진보의 정당 만들기 : 실패에서 더 나은 새 출발로
박상훈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 / 정치학 박사)
1.
정치 개혁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지배 담론은 당내 민주주의였다. 즉 경쟁하는 정당들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하는 정당 체제 차원의 문제보다, 정당이라는 하나의 단위 안에서 인물을 교체하고 외부에 개방하는 데 지나치게 관심이 많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정당은 특정의 이념과 당원, 지지자를 가진 자율적 결사체이다. 그들을 결집시키는 그들만의 이념과 열정, 이해관계가 우선적으로 중요하다. 그들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강한 리더 중심의 위계 구조를 가질 수도 있고 집단지도체제를 가질 수도 있고 평당원 중심의 수평적 결정구조를 발전시킬 수도 있다.
정당 체제는 다르다. 민주주의라면 무조건 복수의 정당이 있어야 하고, 그들이 사회 갈등의 다원적 구조에 상응해 넓은 대표성을 갖도록 이념적・계층적・대중적으로 넓게 포진해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의 문제는 정당이라는 단위의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당 체제라고 하는 복수의 정당들이 사회를 얼마나 넓게 대표하는가에 있다. 민주주의가 갈등의 체계라고 한다면 갈등을 조직하는 정당들이 몇 개인지, 그들이 대표하는 사회 갈등의 폭은 얼마나 넓은지, 정당들 사이의 이념적 거리는 어떤지 등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개방적이어야 하는 것은 정당이 아니라 정당 체제이다. 기존 정당 체제가 사회 갈등을 대표하지 못하는 협애성을 갖고 있다면 새로운 정당이 만들어지고, 이들의 정당 체제 진입이 용이해져야 한다. 그래서 기존 정당들의 행위 양식에 변화를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는 여전히 기존 정당들과는 종류가 다른 외생정당의 충격이 필요하며, 우리가 하는 민주주의가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조건 위에서 실천될 수밖에 없다면 그 핵심은 가장 중요한 생산자 집단이라 할 노동의 가치에 기반을 둔 진보정당에게 그 과업이 맡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발표자가 진보정당 있는 민주주의의 길, 노동 있는 민주주의의 길을 강조했던 것은 그 때문이며, 적어도 객관적으로는 아직 그러한 경로로의 발전 가능성은 폐쇄되어 있지 않고 열려 있다고는 생각한다.
2.
그간의 한국 정치는 갈등의 구조에 있어서나 이슈 내지 어젠다에 있어서 진보화의 경향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이번 대선은 그 절정이 아니었나 싶다. 민주당도 그랬지만 새누리당이 당의 상징 색부터 시작해 경제민주화와 복지, 노동 등 진보 이슈와 대립하지 않고 적응하려 했다는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문제는 의제와 이슈는 진보적이었지만 진보정당들의 영향력이 최소로 축소되었다는 데 있다. 객관적 조건은 진보정당에 나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진보정당(들) 스스로의 문제 때문에 그 기회를 잃어왔던 것이 그간의 사정이 아니었다 싶다.
통합진보당에서 진보정의당까지의 사태를 이를 잘 보여준다. 대중정당으로의 전환 실패라고 요약될 수 있는 그 과정은 크게 두 차원으로 정의될 수 있겠다. 우선 거시적인 차원에서 볼 수 있다. 처음 통합진보당에 참여했던 세 세력은 시간 제약 때문에 정당 만들기(party making) 단계를 거친 다음 총선에 나가지 못하고 일단 선거 연합의 단계에서 총선을 치르기로 결정했다. 요컨대 정당 만들기를 둘러싼 정치적 비용은 총선 이후 치르도록 예정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총선 결과에 안주하면서 통합진보당은 분열되었고, 그 이후 정당 만들기의 과제는 통합진보당과 진보정의당으로 나뉘어 시도되게 되었다. 이를 애초의 상황 내지 원점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부문 운동과 지역에서 진보정당의 활동 근거를 궤멸적으로 파괴시켰다는 문제도 있지만, 지금 있는 여러 진보정당들을 다시 합치는 경로를 다시 밟을 수 있는 조건도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진보정의당은 다른 세력과의 연합의 문제로 접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에, 자신 내부의 정치 에너지를 어떤 방법으로 최대 활용해 스스로 어떤 진보정당을 만들고 성장할 것인지 하는 문제에서 승부를 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사태는 단순화되었지만, 이번 대선에서 진보정의당이 보여준 태도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전망은 부정적이다.
이는 두 번째의 미시적인 차원과 깊은 관련이 있다. 통합진보당을 만들 당시 세 세력 안팎으로 매우 복잡한 전략 상황이 있었다. 민주노동당은 당권파와 비당권파의 갈등이 있었고 당권파는 국민참여당과 연합을 추진하려 했던 반면 당내 소수파였던 비당권파는 진보신당 탈당파를 불러들여 상황 변화를 모색했다. 진보신당 안팎에서의 갈등도 유사한 전략 상황을 낳았고 결국 통합파로 불리는 세력 역시 재분열을 통해서 통합진보당으로 향할 수 있었다. 그 밖의 시민운동 세력이나 참여당 역시 적극적 조건에서 참여한 것이 아닌 소극적 상황에서 합류하게 되었다는 유사성을 가졌다. 말하고 싶은 것은, 진보적 대중정당/대중적 진보정당을 향한 통합진보당 결성은 각 세력 내부의 갈등적 상황이 만든 결과라는 측면이 컸고, 그러다보니 불안정하고 유동적인 전략 상황을 끊임없이 만들어낼 불안 요소를 잠복한 상태로 출발했다는 것이다. 총선 이후 누구도 정당 만들기 프로젝트를 준비할 수 없었던 것, 아니 준비하려하고 해야 한다는 의식조차 갖지 않았던 것은 이런 상황 때문이었는데, 어쩌면 이 때문에 통합진보당 사태는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상당정도 예견되어 있었던 일이었는지 모른다.
지금의 진보정의당으로의 전환 역시 유사하다. 오히려 통합진보당을 결성할 때보다 더 적극적 에너지를 갖지 못했다고도 할 수 있다. 대중적 동력보다는 정파 내지 계파 담합이 진보정의당의로의 분당을 이끈 주된 힘이었다고 보겠다. 참여당계의 양해에 의존해 지도부와 대표체제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도 그랬지만, 지난 대선 후보 결정과정과 그 이후 나타난 문제들은 그 집약판이라 할 수 있다. 통합진보당은 선거를 거치며 당 내부의 문제를 어느 정도 다뤄가고 당원들의 열정도 어느 정도 회복한 반면, 진보정의당은 당으로서 선거를 치루지 못했고, 그 갈등 요인은 향후 새로운 형태로 표출될 여지만 안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어떻게 정당을 만들지 누가 주도할 의지를 갖는지 하는 문제에서 내부 합의는 전혀 보이지 않으며 이 상황에서 누가 책임 있는 역할자로 나서야 하는지 등의 문제에서도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는 듯 보인다. 지역이든 부문이든 시민생활의 현장 속에서 진보정의당의 활동 기반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그들만의 담화, 그들만의 폐쇄회로, 그들만의 암시장 같이 존재하다보니 가끔 술집에서나 그 존재를 확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측면에서 보아도 진보정의당은 언제든 터질 수 있는 위기를 내연하고 있다고 아니 할 수 없다. 아니면 문제를 터지게 할 힘도 없어졌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어디서부터 대안을 모색해야 하나. 아래와 외부로부터의 변화 내지 전환의 계기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만큼 당 안팎의 정신적 조건은 매우 나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의원들 개인이나 사회적 인지도에서 그나마 나은 몇몇 리더들의 개별적 자율성은 커졌다. 달리 말해 당에 헌신할 유인은 매우 줄었고 반대로 자유행동의 여지는 커졌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강력한 형성기 리더십 혹은 전환적 리더십을 구축하고 이를 초점으로 새로운 정당 만들기의 에너지를 집약해낼 수 있을까는, 아무리 이리저리 둘러봐도 답 없는 일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정치란 가능의 예술이고 또 언제든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예비되어 있는 것이 정치의 본질이기에, 누군가 제대로 된 정당 만들기에 도전하고자 하는 열정을 가진 지도부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을 가정하고, 발표자의 관점에서 생각해봤으면 하는 문제들을 두서없이 자유롭게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3.
어느 사회에서든 진보가 성장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도전은 ‘이견을 다루는 문제’에 있다. 이견은 언제 어디서든 있다. 이견은 없앨 수 없다. 유사한 생각을 갖는 사람들끼리 서로 다른 의견집단을 갖게 되는 것은 정치의 본질이자 인간의 본성에서 기인하는 현상이다. 따라서 없앨 수 없는 이견을 없애려 하거나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의 원인을 다른 이견집단에 전가하는 것은 분열을 심화시키고 각자의 내면만 황폐하게 만들 뿐이다. 생각이 다른 세력을 모욕하고 경멸하는 것만으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성공한 진보정당들의 과거 경험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분명하다. 그것은, 이견을 갖는 집단들을 합리적인 경쟁과 공존의 틀 안에 묶어 두고 각자가 갖는 영향력의 크기만큼 책임성을 부과할 수 있어야만 분열보다는 협동의 가능성을 키워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정파 때문에 문제라는 말도 많이 하는데, 그것 역시 인과적으로 잘못된 이해방법이라 할 수 있다. 파당을 짓고 정파를 만드는 일은 인간의 정치에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과거 권위주의 독재정권과 싸우면서 자연스럽게 정파가 등장했고 또 유익한 측면도 많았다. 그것은 감시와 탄압을 피해 저항을 효과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 방법이었고,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는 심리적 지지대의 역할도 했으며, 서로 신뢰하는 운명공동체로서 편안함을 갖게 했다. 문제는 민주화가 되고 진보적 대중정당의 공간이 열렸을 때 발생했다. 안정된 리더십을 구축하고 조직의 공식 결정기구를 확고하게 자리 잡게 하면서 참여와 대표, 책임성의 원리가 실천되는 다양한 제도와 조직 문화가 성장했어야 했는데, 이 과제들에서 성과를 내는 데 실패하다보니 진보정당이 잘 조직된 정파들의 사냥터로 전락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문제의 핵심은 정당을 제대로 만들지 못해 결과적으로 정파가 전횡하게 된 데 있고, 따라서 정파의 폐해를 극복하는 문제 역시 정당을 제대로 만드는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당이 제자리를 잡은 뒤에는 합리적 제도와 절차에 따라 운영되어야 하겠지만, 정당을 그렇게 만드는 형성기 내지 전환기에는 강한 리더십이 핵심이다.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스웨덴의 진보정당 역시 수권 정당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당 리더들의 평균 재임기간은 20년에 가까웠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의 중심 문제는 좋은 통치자를 뽑는 것에서 시작된다. ‘미국 헌법의 아버지’ 제임스 메디슨이 강조했듯, “먼저 통치를 가능케 하고 사후적으로 통치가 자의적이 되는 것을 통제”해가는 접근 없이 어느 인간의 조직도 성과를 낼 수 없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말마따나, “리더십이 없는 민주주의는 관료본능이 아니면 도당들의 지배로 귀결될 뿐”이다. 권력은 가시적일 때 책임을 물을 수 있다. 강력한 리더십 없이 강력한 대중권력은 불가능하다. 그럴 경우 당은 보이지 않는 정파 권력들의 놀이감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게 정치학의 가장 오래 된 기초 이론의 하나이다. 리더십과 권력의 문제를 회피하고 이룰 수 있는 정치적 성취는 없다. 권력을 통해 권력을 통제하는 접근, 야심을 통해 야심을 견제하는 접근, 이것이 곧 근대 정치학의 출발이다. 이러한 정치의 본질 속에서 어떻게 선한 목표를 성취할지 고민하는 것이 진보가 해야 할 일이지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지금 진보정의당에서도 할 일은 강력하고 위계적인 단일지도체제를 어떻게든 만들어 당이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먼저이고, 그와 짝을 이루어 지도부의 임의성 내지 과도함을 견제할 당내 다원주의를 만드는 일이 될 것이다. 물론 그 핵심은 지도부에 도전할 수 있는 대안 세력들이 자유롭게 조직되어 공개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여는 것이고 여기에 기존 정파든 참여계든 차세대 리더십이든 집단적 활동의 자유를 주는 데 있을 것이다. 적어도 기본 방향은 이래야 한다고 본다. 예나 지금이나 민주집중제 없는 초기 정당 형성 과정이 가능한지에 대해 필자는 회의적이다.
4.
민주주의에 대한 진보의 편향된 이해 역시 지난 통합진보당 사태로 파탄을 맞게 됐다. 그간 진보는 자신들만의 민주주의가 갖는 특별함을 내세웠다. 우리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안 한다거나, 절차적 민주주의는 저급한 것이고 자신들은 실질적 민주주의를 지향한다거나, 공식적 대표의 체계가 중심이 되는 대의 민주주의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고 풀뿌리 당원들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직접 민주주의가 진짜 민주주의라거나 하는 등 자신들만의 민주주의가 옳음을 강조했던 모든 논리들은 웃음거리가 됐다.
‘진보정치도 정치’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고 본다. 우리 사회 진보는 과거에도 진보적이었고 지금도 진보적이다. 그 진정성과 초심을 의심하지 않는다. 사람은 성년에 들어설 때 가졌던 사회적 생각을 잘 바꾸지 않는다. 그때 가졌던 민중적 열정, 좀 더 평등하고 좀 더 자유롭고 좀 더 함께 살 만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열망이 갑자기 사라지거나 하지는 않는다. 살면서 그런 열정을 지키지 못하게 되는 것은 그것을 지키고 실천할 힘이 없기 때문이다.
진보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은 종류가 다른 일이다. 자주 이야기하지만, 진보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에는 아주 좁은 오솔길만이 있다. 그 길에서 종류가 다른 두 일의 가치를 병행발전하게 하려면 실력이 있어야 한다. 권력이 갖는 악마적 요소에 굴복하지 않는 것, 오히려 권력을 선용할 수 있는 강한 내면과 유능함을 갖추는 것, 그것 없이 정치를 통해 진보적 가치를 실현할 수는 없다. 그렇지 않고 진보적이어야 한다거나 진정성과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소리 높여 외친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들은 진보에 대해 현실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진보는 왜 운동은 잘하는 데 정치적으로는 무능할까. 체제와 제도에 맞서 항의와 싸움은 잘하는데 뭔가 대안적인 체제를 만들고 제도를 운영하면서 성과를 일궈 가는 일에 있어서는 왜 실력을 보여 주지 못하는 걸까. 작은 정당을 제대로 이끌 능력도 안 되면서 국가와 정부를 책임질 수는 있을까. 이 모든 것이 다 하나같이 중요한 문제제기라 생각한다. 이제 시민은 진보세력에 대한 부채의식에서 벗어났고 평등한 심리상태를 갖게 되었으며 진보도 실력만큼 표를 준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정치는 진보보다 수백, 수천 배 더 넓은 세계다. 인간이 갖고 있는 복잡성을 다른 어떤 세계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부하게 담고 있는, 가장 인간적인 세계가 정치다. 진보 안에 정치를 억지로 맞출 수는 없는 일이다. 진보를 위한 특별한 정치? 진보를 위한 특별한 민주주의? 그런 건 없다. 있는 그대로의 민주주의, 있는 그대로의 정치의 세계에 적응해서 제대로 민주적이어야 하고 제대로 정치적이어야 한다. 정치에서 진보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을 만큼 민주적으로 더 강해져야 한다.
진보는 민주적인가. 진보가 반드시 더 민주적인 것은 아니다. 보수만이 아니라 진보 역시 민주주의에 위배되는 방법으로 자신들의 목표를 추구하려 할 때 파국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통합진보당 사태를 이를 잘 보여준 바 있다. 비례대표 경선을 위한 투·개표가 잘못되었다면 그에 합당한 결정과 조치가 내려져야 했다. 경선 부문 당선자 및 후보자의 사퇴는 최소한의 책임성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그 뒤 누가 왜 이런 부정선거를 주도했는지가 밝혀질 때까지 철저한 조사가 계속돼야 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당 체제 전반을 개선하겠다는 약속도 했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핵심은 경선과 투·개표 관리를 책임진 당권파가 당내 야당이 되는 길을 선택하는 데 있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오늘의 여당이 내일의 야당이 되고, 오늘의 야당이 내일의 여당이 될 수 있는 데 있다. 오늘의 여당이 내일에도 계속 여당이 되는 것을 권위주의라고 한다.
통합진보당 내 당권파로 불리는 사람들은 경선이 잘못된 것임을 인정하지도 않았고 책임지려고도 하지 않았다. 당내 공식 결정기구를 폭력으로 무산시키면서도 당당했다. 아마도 이런 생각인 듯하다. 우리는 민족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 헐벗고 굶주리면서까지 그 길을 지켰다. 우리의 진정성은 의심받을 수 없다. 나쁜 의도로 그런 것도 아니고 부정부패하고 권력을 향유하기 위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부정선거라며 우리를 모욕하거나 반민주세력으로 모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민주주의는 의도의 진정성에 있는 것도, 추구하는 목표나 지향하는 내용의 고결함에 있는 것도 아니다. 민주주의는 서로의 진정성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공존하는 것에서 시작되고, 그런 이견과 차이 속에서 구속력 있는 공적 결정을 도출해가는 평화적 원칙을 말한다.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절차와 방법을 제도화하는 것 없이 민주주의는 존재할 수 없다. 절차나 제도적 형식은 껍데기이고 중요한 것은 나와 우리의 진정성이라고만 주장한다면, 그래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결정을 내릴 제도나 절차, 사람을 폭력으로 제압해도 좋다고 생각한다면, 안타깝게도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라 전체주의에 가까운 일이다.
흔히 그런 사람 가운데 발언의 자유를 앞세우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야 하고 자신들이 설득되기 전까지는 어떤 결정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수결은 민주주의가 아니라며, 억지를 내세우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민주주의는 발언의 자유가 아니라 평등한 발언권에 기초를 두고 있고 다수결을 최종적 결정원리로 삼는다. 그렇지 않다면 조직된 소수가 얼마든지 결정을 막을 수 있고, 결국 다수의 지배가 아닌 소수의 지배가 관철될 수밖에 없다. 미국 상원에서 발언의 무한한 자유를 주장하는 필리버스터링(filibustering]을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대표적인 제도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발언권 평등의 원리 때문에 발언 시간 제한도 주어져야 하고, 소수파의 끝없는 문제 제기로 어떤 결정도 불가능하게 해서는 안 되기에 다수결의 원리가 옹호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절차적 민주주의의 중심 원리들이고, 이것이 위협당하면 민주주의가 아니게 된다.
진정성이니 실질적 민주주의니 하는 것을 앞세우면서 민주주의의 절차적 정의를 부정하는 것이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민족이든 인민이든 혁명이든 종교든, 고결한 가치에 대한 헌신만으로 인간 사회를 이끌 수 있다는 태도의 귀결은 공산주의, 나치즘, 종교전쟁이었지 민주주의는 아니었다. 통합진보당 사태는 민주주의를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진보적 반민주세력’과 맞서 싸우는 일도 중요하다는 것을 실증한다.
5.
인정하기 싫겠지만, 민주주의에서라면 보수의 집권이 좀 더 긴 경우가 일반적이다. 인간은 유기체이고 따라서 병들고 죽는 것에 대한 공포만큼 두려운 것이 없다. 사회도 일정한 균형의 체계를 갖는데, 1997년 외환위기 때 경험했듯이 체계의 균형이 붕괴되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건 없다. 따라서 유기체로서의 인간이든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체계로서의 사회든 생존과 지속성을 중시하게 되는 바, 보수성은 어쩌면 생래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변화와 진보도 인간 삶 내지 인간 사회의 생래적 측면이다. 누구도 지루한 삶 내지 정체된 사회를 좋아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좋은 민주주의라면 진보와 보수가 경쟁해서 유익한 사회적 결과를 낳게 하는 것이 중요하지 진보만의 아름다운 세계는 꿈으로는 존재할지 모르나 그게 현실이 된다면 적어도 민주주의는 아닐 것이다.
보수와는 달리 진보는 민주정치에서 많은 핸디캡을 갖는다. 기성체제의 수혜자로서 보수는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편재되어 있는 ‘지금의 현실’을 고정시켜 해석하는 것만으로도 프리미엄을 얻을 수 있다. 반면 진보는 운명적으로 ‘지금의 현실이 변화되고 개혁된 미래’를 행위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존재이기에 어려움이 많다. 당연히 어떤 미래여야 하는가를 둘러싼 관점과 지향은 여럿일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정파적 분열과 사상투쟁의 가능성은 상존한다. 누군가 뛰어난 사람이 등장해 개혁되고 진보된 미래 사회의 모습을 제 아무리 잘 이론화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갖는 불확실성 때문에 언제나 ‘확신의 딜레마’를 안을 수밖에 없기도 하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보수와는 달리 진보는 실력이 없으면 정치적으로 성장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 ‘구조적인 불이익’에 맞서 물리력이나 폭력을 동원할 수도 없다. 그런 시도는 그들을 곧 ‘반민주’ 세력으로 만들거나 혹은 정치적으로 배제되는 계기로 작용할 것이다. 따라서 ‘혁명의 방법’이 아닌 ‘민주주의의 방법’으로 보수와 경쟁하는 일은 애당초 진보에게 불공정한 게임인 면이 분명 있다. 그러나 진보가 넘어서야 할 도전의 벽이 높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인간의 역사에서 진보의 성취가 더 빛나고 그 효과도 오래간다는 점도 분명하다. 어쩌면 진보의 가치는 바로 그런 점에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인간은 피조물이다. 아무도 원해서 태어난 사람 없고 누구든 병들고 죽을 수밖에 없는 ‘비극적 운명’의 존재이다. 그래서 공허한 삶이 되지 않도록 신념 갖는 것이 중요하다. 정치에서 신념은 더욱 더 중요하다. 그것이야말로 허영심 내지 권력본능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내면의 힘이기 때문이다. 정치는 그야말로 사납고 위험한 분야가 아닐 수 없다. 감당할 수 없는 윤리적 딜레마로 둘러싸여 있다. 그러나 휠덜린의 시에서 말하고 있듯이 “구원은 위험이 있는 곳에 있다.” 어쩌면 인간의 사회에서 위대한 성취를 가져오는 모든 일이란 다 그런 위험한 도전 속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정치의 시작과 끝, 알파와 오메가는 바로 이 지점이 아닐 수 없다.
객관적 자질과 책임 의식을 갖추는 문제도 중요하다. 실존적 차원의 고민과 결단도 중요하다. 그 사이에서 누구도 대신해 주기 어려운 결정을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정치의 테마, 그 속에서 빛나는 인간 정신을 어떻게 고양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영원한 질문” 앞에 우리는 서 있다. 그래서 우리가 바랄 수 있는 것은, 좀 더 인간적이고 좀 더 정치적 이성을 갖춘 진보파가 늘어나 부디 이 질문에 대한 멋진 대답을 실천으로 보여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게 진보정치에 대한 우리의 기대가 가질 수 있는 현실적 범위이고, 이걸 인정하면 훨씬 진보정치에 대해서도 제대로 격려하고 제대로 지지하고 제대로 동참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정당을 기대하고 그걸 가능케 하는 책임있는 리더십을 바란다. 첫째도 둘째도 또 셋째도 고민해야 할 것은, 강력한 지도부-강력한 정당의 형성이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한 것이며 그것 없이 다른 어떤 고민도 한가하고 사치스러워 보인다.
6.
그런데 지금 진보정의당은 너무 조용하다. 대선이라는 큰 사건이 끝났는데도 진보정의당은 말이 없다. 민주당이 대선 패배에 대한 책임성 실천의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있는 것에 비한다면 다소 특별해 보인다. 천막당사라도 칠듯이 변화를 위해 몸부림쳐야 할 것 같은데, 너무들 한가하고 편안해 보인다. 왜 그럴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발표자의 생각으로는 지난 대선에서 진보정의당이 사실상 정치적 결정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결정이 없었으니 평가할 것이 없고 평가할 것이 없으니 조용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 같다.
혹자는 평가가 없지는 않았다고 응수할지 모르겠다. 언론을 통해 진보정의당 쪽에서 나온 대선 관련 이야기는 듣기는 했지만, 그걸 보고 느끼게 된 것은 당사자가 아닌 정치평론집단의 평가 같다는 생각이었다. 책임 있는 당사자로서의 평가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누군가 대선 평가를 둘러싼 책임 윤리의 측면에서 진보정의당은 민주당보다 못하다고 말한다고 해도, 반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7.
진보정의당은 정당인가? 법률적으로는 물론 정당이다. 하지만 정당은 특정의 세계관을 공유하는 집단이기도 하고, 리더십·당관료·활동가·당원이 체계적으로 연계된 조직이기도 하다. 또 중대 정치 사안 때마다 집단적 결정을 하고 그것에 따라 시민과 지지자, 당원에 책임을 지는 규범적 실체이기도 하다. 진보정의당은 그렇게 보이지가 않는다.
이렇게 질문하면 문제가 선명할 수 있다고 본다.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나? 누가 설명의 책임을 지는가? 오늘의 집담회 자리도, 당의 평가가 있고 그걸 가지고 토론할 수 있었어야 했다. 그렇지 못하니, 정당이 무슨 세미나 하는 정치한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최소한 누구에게 문제를 제기하고 지금보다 나은 행동을 주문해야 할지는 명확해야 한다. 이 점에서 ‘친노’에게라도 책임을 물을 수라도 있는 민주당이 진보정의당보다 민주적으로 우월해 보인다.
8.
당내 대의기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어있는지는 몰라도 과거의 연장에 있다면 최고위원회, 전국운영위, 중앙위, 대의원대회 등등의 이름을 들어본 기억이 있다. 본 발표자는 이 조그만 정당에서 왜 이런 중층적 대의기구가 필요한지, 이해하기 어렵다. 당 대표도 왜 늘 공동대표인지는 더더욱 알 수 없다.
발표자가 볼 때, 그것은 책임의 소재만 불분명하게 할 뿐이다. 이런 대의 체제에서는 어떤 리더십도 책임 있는 결정을 할 수 없다. 누가 권력자인지가 분명해야 한다. 민주주의에서 권력은 최대한 가시적이어야 하고 그래야 민주적 책임을 물을 수 있고, 그래야 대중권력이 강해진다. 현재와 같은 조직 체계에서는 정파와 계파, 부문 이익들이 제도 안에서 숨기 딱 좋다. 굳이 위험한 결정을 감수할 의사를 갖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되니까 정당의 조직 자산은 쉽게 탕진되고 당 생활의 활력은 발휘될 수 없게 된다.
아마도 다양한 계파나 정파의 이익 내지 부문 운동의 대표성을 안배할 필요 때문에 그렇게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결정 구조, 즉 책임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없는 대의 체제 내지 조직 체제를 지속하는 것의 장점을 본 발표자로서는 알 수가 없다. 어떤 조직이든 신뢰를 제도화할 때 제 기능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에게 진보정의당 나아가 그간의 진보정당 조직 체계는 신뢰가 아니라 “신뢰하지 않음을 제도화 한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의 중층적 대의 체계 내지 조직 체계는 훨씬 더 단순화되어야 하고 무책임을 제도화하는 집단지도체제는 조속히 단일화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 리더십의 기능이 살고 그래야 누구에게 권한을 갖게 하고 그 책임을 물을지가 분명해 진다고 본다. 그래야 어디서부터 일을 시작할지가 분명해지고, 현재와 같은 당 운영에 불만이 있는 대안 세력들이 도전할 수 있다. 차이와 이견이 공개적으로 표출되고 다원적 의견 집단이 경합할 수 있어야 정당이 산다.
9.
국회 의원실의 보좌진들로부터 특별 당비를 의무적으로 걷는 것은 정당화되기 어렵다. 아무리 재정 문제가 어렵고 당의 뜻이 그렇다 해도, 권리관계에 있어서 그들은 피고용자들이고 자신의 임금에 대한 통제권을 스스로 가져야 한다. 게다가 그들에게 임금을 지급하는 주체는 원칙적으로 정치라는 공익적 역할을 위해 세금을 납부하는 시민이다.
더 큰 문제는 당의 재정문제를 당원에 의존해 해결해 나갈 유인체계를 약화시킨다는 데 있다. 당장은 어렵다면 최소한 시한을 정해야 하고, 그 뒤에는 의원실의 특별 당비가 아닌 당원의 당비 납부에 의존하는 정당이 되겠다는 약속은 해야 한다. 적어도 그렇게라도 해야 당원 늘리고 당원 교육 열심히 하려 하고 당원의 참여와 당비 납부에 의존하는 대중정당이 되고자 하는 이유를 갖게 될 것이다. 대중 참여가 아닌 국가 예산에 의존해 운영되는 정당을 진보정당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10.
정당도 좋은 관료제를 필요로 한다. 관료제의 윤리성은 당의 결정과 규정에 철저하게 복무하게 하는 대신 명예와 직업 안정성을 부여하는 것 위에서만 좋아질 수 있다. 직급과 경력의 체계가 안정되어야 한다. 이 문제는 지도부와 함께 정치적 책임을 공유하는 정무직과 달리 비정무직 당 관료제를 발전시키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본 발표자가 볼 때 중앙당과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정치를 하는 문제가 있다. 그러면 안 된다. 정파나 특정 리더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 당 관료제를 안정시킬 수는 없다. 관료는 관료다워야 하고 정치가는 정치가다워야 한다. 직분에 맞게 개인의 발전과 전체의 발전이 양립될 수 있는 기능 체계를 발전시키지 못하면 조직은 성장하지 못한다.
11.
진보정의당이 공유하는 이념과 가치가 무엇인지 모호하다. 이제 진보라는 개념으로 그 내포와 외연을 명확히 하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 진보라는 표현은 일종의 잔여적 개념이었다. 이념적 언어가 자유롭지 못한 조건에서 어쩔 수 없이 채택된 면이 크다. 보통 정당 이름에 progressive라는 용어가 들어가면 대개는 부르주아 정당이거나 보수적인 정당일 가능성이 높다. 전간기 독일의 진보당이 대표적인 사례이지만 대개는 발전주의 내지 성장주의적 가치를 표현하는 용어일 때가 많다. 아마도 민주당과 공화당이라는 양당체제에 대한 도전이 간헐적으로 Progressive Party라는 이름으로 시도되었던 미국이 우리와 유사한 거의 유일한 사례일 것이다.
정의 즉 justice라는 용어로도 해결이 안 된다. 정의라는 표현이 정당의 이름에 들어가는 경우 좋은 사례가 거의 없다. 본 발표자가 아는 한 2차 세계대전 이후 이태리의 ‘자유정의당’라고 하는 비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 정당이 거의 유일한 예외가 아닌가 한다. 하지만 이 정당은 결성 후 최초 선거에서 완패해 곧 사라지고 말았다.
왜 한국의 진보세력들은 사회민주주의에 대해 소극적인지 참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보편적 사상과 이론으로 이미 갖춰져 있고 유럽의 많은 나라들에서 확고한 성공 사례로 자리 잡고 있는데도, 다른 무슨 이념성을 갖고자 사민주의를 피해가려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들의 앞선 경험으로부터 배워 학습의 비용을 줄일 수도 있고, 국제적 연대도 용이하고 등등 수많은 장점이 있는 데,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그런데도 민주당과는 아무런 유보 없이 자유롭게 연대하니 참 신기한 진보정당 같다는 생각이 든다.
냉정하게 말해, 한국에서 진보가 집권하려면 사회민주주의 세력과 민주당 범위 안의 진보적 자유주의 세력이 연대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사민주의가 아닌 이념으로 진보적 자유주의와 연합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두 이념 사이의 거리는 매우 가깝다. 자유주의 범위 안에 있는 다른 자유주의 세력들과의 거리보다 훨씬 가깝다. 진보 안의 사민주의와 그렇지 않은 세력 사이의 거리보다도 훨씬 가깝다.
당 리더십이 확고해지고, 당 관료제도 안정화되고, 이념적 합의도 사민주의로 구체화된다면, 당 내 교육과 정책 프로그램 개발에 드는 비용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유럽 사민주의 정당들의 교육 자료를 참조할 수 있고 그간 그들이 국가와 사회, 경제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도 구체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도 진보정당이 자신의 이념적 내용은 사민주의로 정의하는 데 주저거리는 이유를 도저히 모르겠다. 이름을 현재의 진보정의당으로 두더라도 그 안에서 사회민주주의를 구체화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당연하고 합리적인 일 아닌가 한다.
12.
교육이 없는 정당은 정당이 아니다. 정당의 가장 오래된 이름은 ‘세계관’이다. 공동의 가치를 공유하는 것 없이 정당이 넓게 확대되고 넓게 당원을 조직할 수 있을까. 정파보다 넓은 연대가 가능하려면 먼저 그것을 담을 ‘의미 내지 의식의 그릇’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집권세력 내지 보수에 대한 반대만으로 정당이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허상이다.
교육의 문제를 단순히 기관을 만드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비정치적이다. 자칫 교수나 연구자들 불러서 정치학교 만들고 연수원 내지 교육원 만들려 한다면 거의 틀림없이 실패할 것이다. 정당에서 교육은 리더십의 요체이다. 사람의 힘을 모아 영향력을 조직하려는 곳에서는 누가 어떤 교육을 하느냐가 최고의 권력 자원이기 때문이다. 교육자는 길러져야 하고, 교육 내용은 꾸준히 좋아져야 한다. 그 과정은 정말로 정치적인 판단을 동반하는 일이다. 중립적이고 사심 없는 인사가 맡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교육의 문제는 지도부의 정치적 결정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는 중대 사안이다. 당 지도부 책임 아래 교육안과 교육자료 등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거치고 이를 준거로 시도당이 중심이 되어 다양한 교육이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13.
시도당 혹은 광역을 관할하는 지방당의 강화는 진보정당의 미래이자 요체이다. 적어도 지방자치 선거 관련 공천은 이들이 주도할 수 있어야 하며, 재정 기반도 더 강해져야 한다. 인사와 재정에서 시도당이 권력을 가져야 일이 된다.
다양한 민생관련 조직과 교육 및 문화 사업 모델을 개발해 지역의 당협 활동을 지원할 수 있어야 하기도 하다. 시도당이 강해져야 사업을 늘리고 활동가를 필요로 하게 되며 그래야 시도당에서 정치적 미래를 찾을 수 있고 중견활동가들의 이탈을 막을 수 있다.
시도당이 강화되면 당원 확대나 재정 기반 강화를 위한 다양한 사업이 가능할 수 있다고 본다. 시도당 강화와 시도의원의 유기적 결합도 모색해야 한다. 시도당이 유능한 활동가와 출마준비자, 적극적 당원들로 넘쳐나야 진보정당이 산다.
14.
시도당이 강화되면 중앙당의 부담도 준다. 중앙당은 의원실과 유기적인 결합이 더 필요하지 않나 싶다. 그것은 또한 새도우 캐비넷(shadow cabinet)의 길과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의원(실)의 중앙당 참여 및 권한을 강화해 현재와 같이 개별화되어 있는 그 역량이 당의 역량으로 더 충분히 더 잘 발휘될 수 있었으면 한다.
정파 내지 그 유사 대리인들의 결합체 같은 최고위는 있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전국위나 중앙위가 불가피하다면 의결권을 제한해야 하고 가능한 지도부의 권한을 위협하지 않았으면 한다.
당의 기본 체제가 갖춰질 동안 대언론 관련 상투적 일들은 줄였으면 한다. 중대 사안이라면 지도부가 스스로 말해도 좋다. 대변인 발표나 보도자료 회람으로 당이 일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필요가 없어 보인다. 오히려 내부에서 충분히 준비되고 검토할 기회만 약화시킨다고 본다.
15.
당이 강화되고 리더십이 강화되는 문제와 관련한 충분한 모색과 준비가 먼저고 그것에 맞춰 전당대회 등 일정을 관리하는 문제가 다뤄져야 할 것이다. 정당 만들기는 적어도 10년의 비전과 전망이 있어야 가능하지, 당장 눈앞에 일정을 어떻게 할지에 매달리고 거기에 제2창당과 같이 당장 실현되기 어려운 이름을 붙이지 않았으면 한다. 당분간 진보정의당으로 몰려갈 노동도 농민도 그 어떤 것도 없다.
노동 중심 등 이런 말을 앞세우지 않았으면 한다. 말로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뭐가 문제가 있겠는가. 실제 그럴 조직적 능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고 꾸준히 쉬지 않고 내실 있게 일을 하는 문제를 다뤄야 할 것이다. 일이 되게 해야지 작동 가능하지 않은 기대 때문에 좌절과 냉소를 반복하지 않게 해야 한다.
16.
이상 당 경험 없는 외부의 관철자로서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따라서 당연하고 옳은 주장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의견으로 이해되길 바란다. 생각이 달라도 각자가 가진 판단을 더 튼튼하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면 그것으로도 좋겠다.
여전히 나는 좋은 진보정당을 기대한다. 인간미 없는 좌파를 싫어하고 민주적 가치를 농단하는 비이성적 진보를 인정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민주적 좌파의 길 나아가 인간적 진보의 길이 끝났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초점은 진보정의당이 그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데 있을 뿐이다.
진보정의당이 그 역할을 하려한다면, 그 기본 방향은 제2창당이나 재창당 또는 분열 없는 통합 진보정당을 앞세우는 것으로 자족할 일이 아니라, 능력을 키우고 실력을 갖춰가면서 여러 진보 정당‘들’ 가운데 주도적 또는 지배적 정당이 되는 것에 있어야 할 것이다. 다른 진보정당들과의 쓸데없는 경쟁과 갈등으로 시간을 소모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보수 정당들과 정치적으로 경쟁하고 권력의 향배와 국정 운영에 일정한 영향력 행사 쪽으로 방향을 설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 어떤 선택을 하든 양보할 수 없는 문제는 먼저 작동가능한 지도부를 만드는 것의 중요성이다. 누가 지도부인가. 변명하거나 남 탓하지 않는 사람이다. 성과로 말을 하는 사람이다. 술로 일하지 않는 사람이다. 시시껄렁한 일로 시간을 소일하지 않는 사람이다. 혼자 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서로 잘할 수 있는 조직적 조건을 만드는 사람이다. 남들이 알아봐 준다고 자족하는 허영이 아니라 그 기대를 현실의 힘으로 넓고 깊게 물질화할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 지도부를 갖지 못해 진보 쪽의 대중 권력 자원이 탕진되었는 바, 어떻게 해서든 이 문제에서 변화가 있어서 한다. 그 길에서 성과가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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