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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음악 문학 etc.

김남주 詩모음

by 낯선여행 2014. 1. 1.

나는 나의 시가 / 김남주


나는 나의 시가

오가는 이들의 눈길이나 끌기 위해

최신유행의 의상 걸치기에 급급해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나는 바라지 않는다 나의 시가

생활의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순수의 꽃으로 서가에 꽂혀

호사가의 장식품이 되는 것을

나는 또한 바라지 않는다 자유를 위한 싸움에서

형제들이 피를 흘리고 있는데 나의 시가

한과 슬픔의 넋두리로

설움 깊은 사람 더욱 서럽게 하는 것을


나는 바란다 총검의 그늘에 가위눌린

한낮의 태양 아래서 나의 시가

탄압의 눈을 피해 손에서 손으로 건네지기를

미처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배부른 자들의 도구가 되어 혹사당하는 이들의 손에 건네져

깊은 밤 노동의 피곤한 눈들에서 빛나기를

한 자 한 자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그들이 나의 시구를 소리내어 읽을 때마다

뜨거운 어떤 것이 그들의 목젖까지 차올라

각성의 눈물로 흐르기도 하고

누르지 못할 노여움이 그들의 가슴에서 터져

싸움의 주먹을 불끈 쥐게 하기를


나는 또한 바라 마지않는다 나의 시가

입에서 입으로 옮겨져 노래가 되고

캄캄한 밤의 귓가에서 밝아지기를

사이사이 이랑 사이 고랑을 타고

쟁기질하는 농부의 들녘에서 울려퍼지기를

때로는 나의 시가 탄광의 굴속에 묻혀 있다가

때로는 나의 시가 공장의 굴뚝에 숨어 있다가

때를 만나면 이제야 굴욕의 침묵을 깨고

들고 일어서는 봉기의 창끝이 되기를




무심 / 김남주


아침 햇살이 은사시나무 우듬지에서 파르르 떨고

산골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는 내 귀에서 맑다

나는 지금 어머니를 따라 산사를 찾아가고 있다


어머니 그동안 이 고개를 몇번이나 넘으셨어요


니가 까막소 간 뒤로 이날 이때까장 그랬으니까

나도 모르겄다야 이 고개를 몇차례나 넘었는지


옥살이 십년 동안 단 한번도 자식을 보려

감옥을 찾은 적은 없었으되

정월 초하루나 팔월 보름날 같은 날이면

한번도 빠짐없이 절을 찾으셨다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두고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하지만

실은 나도 모를 일이다

자식이 보고 싶을 때

감옥 대신 절을 찾으셨던 어머니의 그 속을

이제 이 고개만 넘으면 어머니 그 절이 나오지요

그래 그래 하면서 어머니는 숨이 차는지

공양으로 바칠 두어 됫박 쌀차둥이를 머리에서 내려놓고

후유 후유 한숨을 거듭 쉰다


니 나왔은께 인자 나는 눈 감고 저승 가겄어야

니 새끼가 너 같은 놈 나오면 그때는

니 예편네가 이 고개를 넘을 것이로구만

풍진 세상에 남정네가 드나들 곳은 까막소고

아낙네는 정갈하게 몸 씻고 절을 찾아나서는 것이여




편지 / 김남주


어머니 그 옛날 제가

외지로 나설 때마다

동구밖 신작로에 나오셔서

차조심하고 사람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하시던 어머니

가다 먼 길 구풋하면 먹어두라고

수수떡 계란이며 건네주시며

옷고름 콧잔등에 찍어 우시던 어머니


이제는 예순 넘은 허리로

끌려간 자식놈이 그리워

철이 바뀔 때마다 옷가지 챙겨들고

흰 고개 검은 고개 넘나드시는 어머니

서러워하거나 노여워 마세요

날 두고 온 놈이 온 말을 하더라도

내 또래 친구들 발길 뜸해지더라도


어머니 저를 결정할 사람은 그들이 아니니까요

사형이다 무기다 10년이다 구형선고 놓기를

남의 집 개이름 부르듯하는 저 당당한 검사나으리가 아니니까요

높은 공부 하여 높은 자리에 앉아

사슬 묶인 나를 굽어보는

저 준엄한 판사나으리가 아니니까요

나를 결정할 사람은 결국 나 자신이고

날 낳으신 당신이고 당신 같으신 어머니들이고

날 키워준 이 산하 이 하늘이니까요

해방된 민중이고 통일된 조국의 별이니까요




어머니 / 김남주


일흔 넘은 나이에 밭에 나가

김을 매고 있는 이 사람을 보아라


아픔처럼 손바닥에는 못이 박혀 있고

세월의 바람에 시달리느라 그랬는지

얼굴에 이랑처럼 골이 깊구나


봄 여름 가을 없이 평생을 한시도

일손을 놓고는 살 수 없었던 사람

이 사람을 나는 좋아했다

자식 낳고 자식 키우고 이날 이때까지

세상에 근심 걱정 많기도 했던 사람

이 사람을 나는 사랑했다

나의 피이고 나의 살이고 나의 뼈였던 사람




아버지 / 김남주


그래 그런 사람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날이 새기가 무섭게 나를 깨워 사립문 밖으로 내몰았다


“남주야 해가 중천에 뜨겄다 일어나 깔 비러 가거라”


그래 그런 사람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학교에 늦을까봐 아침밥 뜨는둥 마는둥 책보 메고 집을 나서면

내 뒤통수에 대고 냅다 고함을 쳤다


“너 핵교 파하면 핑 와서 소 겨야 한다

길가에서 놀았다만 봐라 다리몽댕이를 분질러놓을팅께”


그래 그런 사람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방학 때라 내가 툇마루에서 낮잠 한숨 붙이고 있으면

작대기로 마룻장을 두드리며 재촉했다


“아야 해 다 넘어가겄다 빨랑 일어나 나무하러 가거라”


그래 그런 사람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저녁 먹고 등잔불 밑에서 숙제 좀 하고 있으면

어느새 한숨 자고 일어나 다그쳤다


“아직 안 자냐 섹유 닳아진다 어서 불 끄고 자거라”


그래 그런 사람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소가 병이 나면 어성교로 약을 사러 간다

읍내로 수의사를 부르러 간다 허둥지둥 뭄둘 바를 몰랐으되

횟배를 앓으며 내가 죽을 상을 쓰면 건성으로 한마디 뱉을 뿐이었다


“거시기 뭐드라 거 뒤안에 가서 감나무 뿌리나 한두개 캐다가 델여 멕여”


그래 그런 사람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공책이란 공책은 다 찢어 담배말이종이로 태워버렸다

내가 학교에서 상장을 타오면

“아따 그놈의 종이때기 하나 빳빳해 좋다”면서

씨앗봉지를 만들어 횟대에다 매달아놓았다


그는 이름 석자도 쓸 줄 모르는 무식쟁이였다

그는 밭 한 뙈기 없는 남의 집 머슴이었다

그는 나이 서른에 애꾸눈 각시 하나 얻었으되

그것은 보리 서너 말 얹어 떠맡긴 주인집 딸이었다

그는 지푸라기 하나 헛반 데 쓰지 못하게 했다

어쩌다 내가 그릇에 밥태기 한톨 남기면 죽일 듯 눈알을 부라렸다


그는 내가 커서 어서어서 커서

사람이 되어주기를 바랐다

농사꾼은 그에게 사람이 아니었다

뺑돌이의자에 앉아 펜대만 까딱까딱하고도

먹을 것 걱정 안하고 사는 그런 사람이 되어주기를 바랐다

그는 못 되도 내가 면서기쯤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 자기도 면에 가면 누구 아버지 오셨나며

인사도 받고 사람 대접을 받는다 했다

그는 내가 고등학교 대학교 다닐 때

금판사가 되면 돈을 갈퀴질한다고 늘상 말해왔다

금판사가 아니라 검판사라고 내가 고쳐 일러주면

끝내 고집을 꺾지 않고

금판사가 되면 장롱에 금싸라기가 그득그득 쌓일 거라고 부러워했다


그는 죽었다 화병으로

내가 자본과 권력의 모가지에 칼을 들이대고

경찰에 쫓기는 몸이 되었을 때

식구들에게 둘러싸여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그는 손을 더듬거리고 나를 찾았다 한다




그들은 누구와 함께 자고 있는가 / 김남주


그들은 누구와 함께 자고 있는가

달과 함께 별처럼 자고 있는가

바람과 함께 문풍지처럼 자고 있는가

윗목에서 하품이나 하는 요강과 함께 자고 있는가


그들은 누구와 함께 자고 있는가

부러진 다리 수수밭의

병아리와 함께 자고 있는가

빈 독을 엿보고 문턱을 갉는

쥐새끼와 함께 자고 있는가

엿장수 가위소리에 눌린

고무신짝과 함께 자고 있는가

파리와 함께 모기와 자고 있는가


내가 그들을 본 것은 장날이었다

개똥비누 하나에서 단돈

일원을 깎아내려고 그들은

장바닥을 온통 뒤지고 장거리의 풀빵

타는 냄새에 군침만 흘리는 내가

그들을 본 것은 국도연변

술 파는 담배가게였다 그들은

은하수 아래 청자 밑의 새마을에

눌린 한 봉지 풍년초를 사내려고

별의별 수작을 다 떨었다

빈손으로 술잔이나 비워주기도 하고

씁쓸한 소줏잔에 없는 미소지어 뵈기도 하고

곰보딱지 주모를 꼬시기도 하고


내가 그들을 본 것은 툇마루였다

툇마루에 놓인 밥상 위의 툭사발

속의 둥둥둥 떠오른 멸치

고기를 낚으려고 가로세로 다투는

네 개의 젓가락


아 그들은 누구와 함께 자고 있는가

뒤룩뒤룩 배불러 터진

거머리와 함께 자고 있는가

대창에 찔린 개구리

피와 함께 자고 있는가 고달프고

애절한 사랑과 함께 자고 있는가





꽃 / 김남주



남자들은 왜 여자만 보면 만지려고 그러지요?


그 이유를 말하지.

저기 좀 봐 길가에 핀 꽃, 맨드라를.

나는 금방

맨드라미를 보고 말의 볼기짝이라 생각했고

그 생각에 잠시 잠기다가

그 에게로 다가가고 싶었고

그 향기에 취하고 싶었고

그에게 가까이 막상 다가갔더니 만지고 싶었고

그리고 만졌어 그뿐이야.


왜 꺽지는 않았지요?

울 테니까 꽃이




서울의 달 / 김남주



별 한 초롱초롱하게 키우지 못하고

새 한마리 자유롭게 날지 못하는

서울의 하늘


물 한모금 깨끗하게 마실 수 없고

고기 한마리 병들지 않고 살 수 없는

서울의 강


그리고 아침 저녁으로

공기 한바람 상쾌하게 들이켤 수 없는

서울의 거리


나는 빠져나간다

지옥을 빠져나가듯 서울을 빠져나간다

영등폰가 어딘가 구론가 어딘가

시커먼 굴뚝 위에 걸려 있는 누르팅팅한 달이

자본의 아가리가 토해놓은 서울의 얼굴이라 생각하면서




자유를 위하여 / 김남주



곡괭이에 찍혀

잘려나간 대지의 뿌리

당신은 생각하는가 한두 번의 곡괭이질로

자유의 뿌리가 뽑히리라고

갈고리에 걸려

떨어져나간 하늘의 가지

당신은 생각하는가 한두 번의 갈고리질로

자유의 날개가 꺾이리라고

도끼에 찍혀

흠집투성이가 된 대지의 기둥

당신은 생각하는가 한두 번의 도끼질로

자유의 나무가 넘어지리라고


보아다오 뿌리는 벌써 뻗어

마을로 동구 밖 한길의 네거리로 뻗어내려

찢어지는 산맥 강물의 속삭임과 함께 전진하고 있나니

보아다오 가지는 이미 그 씨방을 퍼뜨려

땅속 깊은 곳 대지의 자궁에서 반전의 싹을 틔우고 있나니

오 자유여

봉기의 창 끝에서 빛나는 별이여





사랑 / 김남주


사랑만이

겨울을 이기고

봄을 기다릴 줄 안다


사랑만이

불모의 땅을 갈아엎고

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릴 줄 안다


천 년을 두고 오늘

봄의 언덕에

한 그루의 나무를 심을 줄 안다


그리고 가실을 끝낸 들에서

사랑만이

인간의 사랑만이

사과 하나를 둘로 쪼개

나눠 가질 줄 안다





나의 칼 나의 피 / 김남주



만인의 머리 위에서 빛나는 별과도 같은 것

만인의 입으로 들어오는 공기와도 같은 것

누구의 것도 아니면서

만인의 만인의 만인의 가슴 위에 내리는

눈과도 햇살과도 같은 것


토지여

나는 심는다 그대 살찐 가슴 위에 언덕 위에

골짜기의 평화 능선 위에 나는 심는다

평등의 나무를


그러나 누가 키우랴 이 나무를

이 나무를 누가 누가 와서 지켜주랴

신이 와서 신의 입김으로 키우랴

바람이 와서 지켜주랴

누가 지키랴, 왕이 와서 왕의 군대가 와서 지켜주랴

부자가 와서 부자들이 만들어 놓은 법이

법관이 와서 지켜주랴


천만에! 나는 놓는다

토지여, 토지 위에 사는 농부여

나는 놓는다 그대가 밟고 가는 모든 길 위에 나는 놓는다

바위로 험한 산길 위에

파도로 사나운 뱃길 위에

고개 너머 평지길 황톳길 위에

사래 긴 밭의 이랑 위에

가르마 같은 논둑길 위에 나는 놓는다

나는 또한 놓는다 그대가 만지는 모든 사물 위에

매일처럼 오르는 그대 밥상 위에

모래 위에 미끄러지는 입술 그대 입맞춤 위에

물결처럼 포개지는 그대 잠자리 위에

투석기의 돌 옛사랑의 무기 위에

파헤쳐 그대 가슴 위에 심장 위에 나는 놓는다

나의 칼 나의 피를


오 평등이여 평등의 나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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